[Review] 박형진 개인전 <푸르게 앉는 공(空)> 리뷰 앞에 놓인 것,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너머의 것

writing 2020년 3월 2일

박형진 개인전 <푸르게 앉는 공(空)> 리뷰

앞에 놓인 것,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너머의 것

어두운 숲을 서성인 적이 있다. 내리쬐는 햇살에 선명하게 빛나던 나무는 어느새 새카만 그림자를 형성했고, 눈앞엔 어스름만이 놓였다. 후레쉬를 찾는 내게 동행인이 말했다. 빛을 켜면 당장의 앞은 보일 테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곳은 보지 못한다고. 우리는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기로 했다. 눈은 서서히 암흑에 적응했고, 우린 모호하게 보이는 숲을 천천히 돌아 나왔다. 눈앞의 것과 저 멀리의 것을 모두 바라보며.

박형진은 본다. 앞에 놓인 것과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너머의 것을 본다. 그리고 본 것을 그린다. 그의 눈은 자주 같은 장면에 머물고, 익숙함이 낯설어지거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멈춘다. <칠월부터 십이월>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창문 밖 초록의 기록이다. 해의 방향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초록을 그려내기엔 손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점으로 색을 찍는다. 계절이 바뀌며 초록은 결국 초록이 아니게 되지만, 박형진은 그 변화한 색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해설한다. 그림이라기보단 관찰기이고, 관찰기라기보단 안부 인사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본다는 것”을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은 망막에 맺힌 대상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아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박형진의 보기 역시 그러하다. 매일매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초록에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일, 그 일은 창밖의 초록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초록의 변화를 알아채는 일이며, 창밖의 초록에 작가 자신을 가져다 놓는 일이다. <칠월부터 십이월>은 박형진과 창밖의 풍경이 서로의 변화를 주고받는 안부 인사일지도 모른다.

박형진은 주변을 본다. 그리고 익숙한 곳을 더 익숙하게 만드는 낯선 요인들을 발견한다. 항상 그곳에 있던 가까운 풍경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 작가는 그 모습을 지나치지 않는다. 퐁티는 보는 이가 그렇듯, 그가 보고 있는 세계 역시 그를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보는 이는 보는 행위의 주체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박형진은 그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선을 인식하고, 변함없던 곳의 생경함을 기록한다. <Hanging>의 납작한 줄무늬는 도심 혹은 교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숙박업소의 입구 현수막의 패턴이다. 이 도상적인 레이어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 자연스레 자리하며 어떤 풍경이든 친숙하게 만든다. 평범한 풍경 속에 홀연히 등장한 이질적인 줄무늬는 인지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보호색을 지녔다. 알아채지 못했을 땐 보이지 않던 것이 보기 시작하니 자꾸만 눈을 마주친다. 전시장의 <Hanging> 역시 그러하다. 빼곡한 풍경들 사이에 놓인 <Hanging>은 마치 익숙한 교외에서 만난 줄무늬 현수막처럼, 천연스럽게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현수막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퐁티에 따르면 보는 행위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작동한다. 보는 이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세계 안에서 지닌 의미를 인지하고, 그 의미를 경유하여 눈앞의 것을 본다.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퐁티는 안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의 은밀한 보완적 상대이며, 보이는 것의 내면에 투명한 무늬로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아도 보았다고 말하던 밤>은 볼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냄새와 연기를 마주한 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린 풍경이다. 박형진이 ‘보이지 않아도 보았다고 말하던’ 그 밤의 모습은 경험으로 빚어낸 의미가 만들어낸 형상일 것이다. 어둠이 내린 숲속은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눈은 어느새 적응하여 눈앞의 형상을 그린다. 눈앞의 것은 선명하지 않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우린 그 희미한 형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의미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

마치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듯 천천히 그 세계에 자신을 세우던 박형진은 <주인있는 땅_성북동>에서 불현듯 후레쉬를 켠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얽혀있는 풍경을 향해 빛을 쏜다. 인위적인 마음이 가둔 풍경은 대체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심은 보이는 땅을 안 보이도록 숨긴다. 도심 속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멈추어진 땅 역시 담장 너머에 있다. 목적이 없는 것 같고, 무용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자체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것의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주인은 땅을 둘러싸고 담을 세웠다. 아무도 보지 않고 지나치길 바라는 그 담장 너머의 땅엔 벌써 잡초들이 그곳의 쓰임을 알아채고 터를 잡았다. 박형진은 주인의 욕심이 고립시킨 그 너머의 땅을 본다. 그리고 그곳이 ‘있음’을 들춰내듯 그 모습을 그린다. 무성해진 풀은 담과 담 사이로 빠져나와 누군가 숨겨놓은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박형진은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만든 너머의 풍경을 보이는 곳으로 옮긴다.

눈이 어둠에 완벽하게 적응하려면 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밝은 빛을 만났을 때 눈부심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2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박형진은 쉽게 빛을 켜지 않고 어둠에 적응하여 주변을 바라본다. 이 지난한 시간을 견뎌 주변의 풍경에 적응하는 것은 비단 멀리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빛을 낼 수 있다는 이유로 어둠이 당연한 이곳을 헤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서 있는 곳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박형진은 보이지 않는 경험을 믿고 주변에 적응한다. 보이지 않는 의미는 선명하지 않은 어둠 속을 보이게 만들어주고, 주변을 망가트리지 않고도 눈앞의 것과 멀리의 것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준다. 박형진은 그렇게 천천히 그를 둘러싼 풍경에 적응하고, 성실하게 그 모습을 기록한다. 마치 서로의 변화를 알아채고 안부를 나누듯 주변의 풍경을 화폭 속에 담아낸다. 하지만 정확한 눈이 필요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후레쉬를 켠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박형진은 보이지 않는 자본의 논리가 숨겨놓은 곳을 들추어내고, 그 욕심이 얽힌 풍경을 화판 위에 박제시킨다. 한 번 후레쉬를 켜면 또다시 30분이 지나야 암흑에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둠 안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이 두렵지 않다. 박형진은 본다. 앞에 놓인 것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을, 그리고 너머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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