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사랑하는 사랑

writing 2019년 4월 29일

“할아버지! 할머니께 뽀뽀하고 가셔야죠~”
“에이 아냐- 나 내일 올게요! 잘 주무셔.”
할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병실 문을 나섰다.

“네 할아버지 쑥스러워서 너 있는 데서는 못하셔.”
“할머니랑 둘이 계실 때는 하셔요?”
“그럼~ 내가 달려가서 안기면 해주시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떠나간 문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지난주,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올해로 아흔이 되는 이 노부부의 동갑내기 남편은 적잖이 놀랐으리라- 이모에게 할아버지가 병실 밖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전해들은 눈물에 터졌다. 그날 나의 시선은 자꾸 할아버지의 눈가에서 멈추었다. 그 곳엔 애틋한 눈빛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떠나고 할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된 병실, 문득 나는 그와 그녀의 길고 긴 사랑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물었고, 그렇게 우린 함께 병원 침대에 앉아 65년의 사랑을 들여다 보았다.
구본정과 정숙진, 두 사람의 나이 25세 때, 이들은 6.25 한국전쟁이 한창인 시절 피난 중 부임한 한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영화 <카사블랑카> 속 여주인공을 떠올리며 집을 떠나온 철없던 정숙진과 학교의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었던 반듯한 청년 구본정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아직도 서로가 먼저 좋아했다고 투덕이기에 그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은 구본정은 조그마한 여인 정숙진에게 산에서 주운 밤과 호두를 선물하며 마음을 표하였고, 정숙진은 그와 함께 퇴근하는 한 여선생을 귀엽게 질투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출석부 속에 쪽지를 넣어 남몰래 데이트 약속을 정하고, 동네 보건소를 둘 만의 아지트 삼아 드나들며 서로에게 깊어졌다.
그 시절 흔치 않았던 연애결혼으로 마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들은, 가까운 절에서 신식 결혼을 하였고 나름 옆 마을 온천으로 신혼여행도 떠났다. 하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도 잠시, 결혼 육 개월 만에 새신랑은 전쟁에 징집되게 되었다. 그렇게 이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가 싶었지만, 젊은 남편 본정은 빡빡 깎은 머리가 다 자라기도 전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숙진이 있는 작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첫 아이를 임신하여 친정집에 머물던 아내는 남편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그 시절의 편지는 아직까지도 남아있어 얄궂은 자녀와 손주들은 종종 할머니에게 그 옛날의 러브레터를 낭송해달라며 그녀의 얼굴을 붉히곤 한다. 그럴 때면 낭랑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할머니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비추던 할아버지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정숙진과 구본정, 이들은 그렇게 서로를 아끼며 육십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걸었다. 스물다섯, 파릇한 나이에 만난 이들은 이제 아흔의 주름진 노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날 좋은 날엔 함께 외출하여 낭만을 즐기고, 아침 밥상 국이 한 그릇만 남아있을 때면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기는 사람이 먹는다. 함께 장을 보고 돌아오며, 당신이 짐 들어준 것을 꼭 일기에 써달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와, 일기장에 그 이야기를 적으며 ‘그럼요. 이 착한 영감아’라고 웃어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봄날의 날씨만큼 따듯하다.

할아버지는 내게 쓰러진 할머니를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고 했다. 정숙진, 당신의 아내가 유난히 찬란했던 작년 한 해를 보낸 후, 아흔의 봄날 멋진 모습만을 남기고 떠나려 하는 줄 알았다며- 할머니는 내게 할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은가 보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전을 곧잘 하고 다니던 구본정, 당신의 남편이 이젠 차키를 쉬이 잡지 않으신다며-

이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에 마음이 일렁인다. 만약 나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왕이면 이들 같았으면-하고도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의 삶에 가장 큰 행운은 ‘사랑’이란 걸 믿을 수 있게 해준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그들을 사랑한다.

(2017년 5월 월간에세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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